EMBLA & ASKR: 신화적 질료, 철학적 오르가놀로지, 그리고 능동적 매개체로서의 루씨어리를 그리며

Raven Cho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Liberal Arts, Bachelor of Philosophy)

초록 (Abstract)

이 에세이는 레이븐포지의 일렉트릭 베이스 프로토타입 모델인 ‘엠블라(EMBLA)’와 ‘아스크르(ASKR)’에 담긴 북유럽 창조 신화의 스토리텔링이, 현대 악기 제작의 재료공학과 음향학적 설계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수동적인 질료(Matter)인 유목이 연주자와 만나면서 능동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변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철학적 오르가놀로지와 신물질주의적 관점을 빌려왔다. 이를 바탕으로, 아스크르 모델은 쉘든 딩월의 ‘멀티스케일 생태계’와 명료함의 철학을 통해 극한의 펀치감과 이성적인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반면 엠블라 모델은 제랄드 말로우의 ‘유기적 공명’과 레지오 톤 우드(RTW) 철학, 그리고 독일 악기상 수상 콘삿 모델의 전통을 바탕으로, 생태적 균형과 따뜻한 어쿠스틱 질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집중한다. 결국 두 악기는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라, 연주자의 개별적인 서사가 더해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능동적 매개체임을 밝힌다. 3

1. 서론: 북유럽 창조 신화의 재해석과 악기 제작(Lutherie)의 존재론적 의미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고대 신화는 단순히 환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신화들은 의미 없는 자연의 파편에 지성과 생명력을 새겨 넣는 '제작(Poiesis)'의 궁극적인 은유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사유의 원천이 되어준다. 『고 에다(Poetic Edda)』의 「무녀의 예언(Völuspá)」과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i Sturluson)의 『신 에다(Prose Edda)』 속 북유럽 창조 신화는, 최초의 인간이 화려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뚜렷하게 그려낸다. 오딘(Odin), 회니르(Hönir), 로두르(Lothur) 세 신은 어느 날 해변을 걷다가 바닷물에 휩쓸려온 두 조각의 거친 유목, 즉 물푸레나무(Ash)와 느릅나무(Elm)의 파편을 발견한다. 이름 없는 이 목재 조각들은 세 신의 손길을 통해 비로소 운명을 부여받고, 아스크르와 엠블라라 불리는 최초의 인간으로 거듭난다. 흔적조차 없는 자연의 파편들이 거대한 의미와 역할을 얻는 순간, 창조 신화의 생생한 숨결이 느껴진다.1

필자는 이러한 신화적 창조의 과정 속 신들이 각각 내린 세 가지 선물이, 현대 일렉트릭 베이스 제작(Lutherie)에 담긴 핵심 공학적 요소들과 놀랍도록 맞아떨어진다고 느꼈다. 오딘이 불어넣은 ‘영혼’은 차가운 목재를 살아 숨 쉬게 해 주는 능동형 프리앰프나 픽업 시스템의 전자기적 생명력과 닮아 있다. 예언과 지혜의 신 회니르가 내려준 ‘감각과 이성’은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가 되게끔 디자인된 치밀한 기하학과 구조공학, 그리고 손에 꼭 맞도록 설계된 넥의 인체공학적 구조로 구현된다. 마지막으로 로두르(불의 신, 로키의 원형으로도 알려짐)가 준 ‘온기와 생기 있는 색채’는, 현의 진동을 따뜻한 배음으로 확장시키는 톤우드의 심리음향적 공명이나, 독특한 수지 접합의 아치탑이 선사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차가운 질료 위에 신화적 생기가 깃들고, 예술적 온기가 더해지는 과정이다.1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신화론에 따르면, 신화는 인간이 마주한 '불편한 모순(Unwelcome contradictions)'을 우회하거나 해소하려는 사고의 도구다.6 야생으로서의 목재와 문명 기술의 집약인 전자회로, 유기적 진동과 디지털 시대의 차가운 해상도 사이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틈이 존재한다. 그러나 레이븐포지의 작업실에서 이 두 세계는 악기라는 중재자를 통해 하나로 녹아드리라 믿는다. 아스크르와 엠블라에서 영감을 얻은 레이븐포지의 악기 라인업은, 각각 분리된 대자연과 첨단 기술을 예술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이어주는 제3의 지시체(The Third Referent)로 자리매김한다.6 

여기서 필자가 구상하는 악기는 소쉬르(Saussure)가 제시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즉 변하지 않는 패턴과 매 순간 창조되는 표현의 이중구조처럼, 신화적 철학과 연주자의 즉흥적 소리를 동시에 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순한 공산품 조립이 아니라, 침묵했던 자연의 조각에 물리적 떨림과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여 능동적 존재(Actant)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고도의 문화 실천이라고 감히 주장해보겠다.6

2. 질료의 기호학과 신물질주의(New Materialisms): 생동하는 물질과 흐름

2.1.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과 사물의 힘(Thing-Power)

현대 악기 제작 철학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선, 물질을 오로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수동적으로 사용되는 둔감한 질료(Passive/Inert stuff)로만 여기는 인간 중심적 시각부터 허물어야 한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에서 세상을 ‘둔탁한 물질(객체)’과 ‘생동하는 생명(주체)’으로 나누는 근대적 감각의 분할(Partition of the sensible)을 비판한다. 베넷에 따르면, 질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나름의 궤적과 성향, 그리고 사건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동성을 지닌 ‘준-행위자(Quasi agents)’이자 ‘행위소(Actants)’다. 오메가-3 지방산이 인간의 기분을 변화시키고, 쓰레기 매립지에서 발생하는 활성 화학물질과 메탄이 환경을 바꾸며,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가 관찰한 아마존의 지렁이가 토양의 화학 성분을 뒤바꿔 숲과 사바나의 경계를 새롭게 만드는 것처럼, 비인간적 물질 역시 커다란 생태적·물리적 변화의 중심에서 활발히 작용한다. 7

스피노자(Spinoza)의 코나투스(Conative bodies) 개념과 아도르노(Adorno)의 비동일성(Nonidentity) 철학에 기대는 베넷의 ‘분산적 행위성(Distributive agency)’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렉트릭 베이스는 금속 현, 픽업 자석, 천연 톤우드 등의 재료들을 인간 연주자와 동등한 위치(Less vertical plane)에서 음악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체로 볼 수 있다. 목재는 결코 인간 제작자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규정되지 않으며(비동일성), 나무가 자라온 기후의 흔적과 기공의 구조는 연주자의 터치에 따라 예상치 못한 배음이나 공명으로 응답하며 고유의 생명력(Vitality)을 드러낸다.7

2.2. 질료에 대항하는 물질(Materials Against Materiality)과 흐름의 궤적

팀 잉골드(Tim Ingold)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이어져온 형상-질료설(Hylomorphism), 즉 인간이 비활성 상태의 물질(Matter)에 임의로 형상(Form)을 부여한다는 오랜 제작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는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의 매질(Medium), 실체(Substances), 표면(Surfaces)이라는 삼분법적 환경 구분을 차용해, 사물은 외부에서 주어진 형태가 아니라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요동과 섞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변화하는(Fluxes of materials), 과정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8 잉골드에게 물질의 본질이란 고정된 속성(Attributes)이 아니라, 그 질료가 지나온 시간과 누적된 이야기(Histories)임을 시사한다.12

레이븐포지가 지향하는 악기 제작 공정 또한 베넷과 잉골드의 신물질주의적 관점에 따른다. 루시어는 목재를 억지로 누르고 가공하는 대신, 나무 자체가 가진 교차 나뭇결의 방향이나 내부 감쇠율 같은 요소와 조화를 이루며,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악기의 형태를 직조해낸다. 이는 인간이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비한 마법이 아니라, 원래부터 물질 속에 잠재된 생성적 흐름을 되살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3. 생산자의 언어(Language of the Producer)와 신화의 파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신화학(Mythologies)』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대량 생산되는 사물—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신형 시트로엥 자동차처럼 익숙한 물건들—은 본래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마치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인 양 포장된다. 이는 탈정치화된 언어(Depoliticized speech)를 거치며 신화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신화가 형성되는 두 번째 차원의 기호학적 체계(Second-order semiological system) 안에서는, 사물에 깃들어 있던 노동의 역사와 감각적인 현실성은 서서히 사라지고 만다. 그 결과, 의미는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기표(Empty signifier)가 대중에게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현상이 빚어진다.13

하지만 바르트는 이러한 부르주아적 신화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산자의 언어(Language of the producer)'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는 벌목꾼은 나무를 그저 감상하거나 낭만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노동과 직접 연결된, 살아 있는 실천의 대상(Operational language)으로 나무를 인식한다. 이런 순간, 신화는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 레이븐포지는 대량생산을 위한 CNC 라우터의 획일적인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가능한 많은 부분에서 반자동 방식의 지그를 직접 조합하고, 대패와 끌을 들어 살아 숨 쉬는 톤우드의 거친 저항과 겨루며 작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선택은 맹목적인 공산품 소비라는 신화를 정면으로 뒤흔드는 작은 반항이자 혁명이다. 이때 악기는 단순히 소비되는 브랜드 기호가 아니라, 연주자와 노동자가 함께 음악적 현실을 새롭게 만드는 '작동하는 사물'로 다시 태어난다.13

3. 음향학과 양자적 얽힘(Entanglement): 목재의 심리음향학과 행위적 실재론

3.1. 톤우드(Tonewood) 논쟁의 실증적 종식과 음향학적 증명

놀랍게도 신물질주의에서 강조하는 ‘질료의 능동성’은 이제 사변적 철학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음향공학과 관련된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그 효용이 실제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솔리드 바디 일렉트릭 기타에서 목재가 단순히 소리를 내는 데 수동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일부 연주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들은 소리의 생성이 오직 픽업의 전자기장과 금속 줄 사이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폄하해 온 것이다.3 

하지만 2021년, 폴란드 AGH 과학기술대학교의 야신스키(Jasiński) 연구팀이 발표한 피어리뷰 논문 「On the Audibility of Electric Guitar Tonewood」는 오랜 시간 굳어져 있던 ‘물질의 수동성’ 신화를 명확히 반박하였다.14 해당 연구팀은 목재 이외의 모든 변수를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CNC 머신으로 동일하게 가공된 네 종류의 목재—사펠레(640.3 kg/m³), 로즈우드(961.2 kg/m³), 소나무(466 kg/m³), 그리고 내부 구조가 상이한 합판(705.4 kg/m³)—만을 사용해 실험용 기타를 제작했다.14 또한 줄을 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편차까지 고려해서, 헤어핀을 개조한 스프링 방식의 기계 장치를 이용해 특정 현(E2, D3, E4)을 정확히 동일한 각도와 힘으로 발현했다. 이렇게 표준화된 실험 조건에서 녹음된 음향 자료를 Focusrite Scarlett 18i8 인터페이스와 파이썬 라이브러리인 librosa로 스펙트럼 분석한 결과, 기존 통념과는 사뭇 다른, 의미 있는 차이를 도출해냈다.14 이 연구 결과는 지금까지 ‘목재는 사실상 음향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식의 양극단적 주장에 강력한 반론을 제시한 셈이다.

야신스키 연구팀의 톤우드 음향학 파라미터 분석 결과 (2021)

스펙트럴 센트로이드 (Spectral Centroid / 소리의 밝기 인지 기준)

- E2 현 (82.4 Hz): 목재에 따라 306 Hz ~ 347 Hz 편차 발생

- D3 현 (146.8 Hz): 목재에 따라 410 Hz ~ 560 Hz 편차 발생

- E4 현 (329.6 Hz): 목재에 따라 1500 Hz ~ 2260 Hz로 극적인 편차 발생

롤오프 (Roll-off / 에너지의 85%가 집중되는 주파수 대역)

- E4 현 타격 시 목재 종에 따라 3220 Hz에서 최대 4810 Hz까지 광범위하게 요동

청각적 식별 임계치 (JND) 및 청취자 테스트 결과

- 정규화된 스펙트럴 센트로이드 차이는 1.0 이상으로, 문헌상 인간의 최소 식별 차이(JND)인 0.15를 압도적으로 초과

- 배음(Harmonics) 레벨은 1dB의 식별 임계치를 훌쩍 뛰어넘는 최대 5dB의 격차 발생

-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청취자도 86.5%의 높은 확률로 목재의 음색 차이를 식별

이 실증적 결과는 합판과 로즈우드 사이의 식별률이 76.3%에 그쳐 다소 아쉬운 수치를 보여주지만, 이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대체재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이 연구는 톤우드가 전자기장 안에서 미세한 기계적 피드백 루프를 만들어내며, 현의 진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능동적 행위자'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셈이다. 목재는 그저 죽은 지지대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음고(Pitch)에 따라 저마다 다른 주파수 응답을 일으키며, 연주자의 손끝과 한데 어우러지는 살아있는 맴브레인(Membrane)으로 작동한다.14

3.2.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 내부작용(Intra-action)

목재의 이러한 음향적 능동성은 양자물리학자이자 여성주의 철학자인  캐런 바라드(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을통해 철학적 깊이를 더하게 된다. 바라드의 이론은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양자역학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주체(연주자)와 객체(악기)는 애초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특정한 물질적·담론적 배치(Material-discursive arrangements) 안에서 서로 얽히며, 그 과정에서 정체성과 경계가 함께 생성되는 '내부작용(Intra-action)'의 산물이다.15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바라드의 '행위적 절단(Agential Cut)' 개념이다. 연주자가 특정 현을 튕기고, 톤 컨트롤 노브를 돌릴 때마다 수많은 음향적 가능성, 즉 파동 함수는 붕괴하여 하나의 지극히 구체적인 소리로 잘려나간다. 이 절단 과정에서 다른 소리의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배제(Constitutive exclusions)된다. 그래서 음악적 창조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포섭하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배제의 윤리학'이자 동시에 '포섭의 윤리학(Ethics of inclusion)'을 수반한다.15 

레이븐포지의 베이스 라인업은 바로 이 행위적 절단의 권한을 연주자에게 가장 예리하게 쥐여주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연주자와 악기가 서로를 규정지으며, 함께 창조성을 폭발시킬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사이버네틱 얽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3

4. 오르가놀로지와 공간의 시학: 기계의 개체화와 내밀한 공명

악기는 단순한 음향 방출 장치를 넘어, 연주자의 심리와 마음이 스며들고 인간의 실존이 머무는 특별한 대상이다. 시몽동과 바슐라르,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유는 이러한 악기의 본질을 한층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

4.1. 기술적 대상(Technical Object)의 구체화(Concretization)와 불확정성의 여백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기술적 대상을 그저 유용성에만 복무하는 노예 혹은 기계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기술적 대상이란 결국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구조로 응고되고 형상화된(Fixed and crystallized in functioning structures), 인간 현실의 보편적 매개자이자 자연과 문화를 잇는 다리라고 설명한다. 현대 사회에서 종종 거론되는 소외(Alienation) 문제 역시 기계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계가 지닌 인간적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문화적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그는 지적한다.20

시몽동은 또, 기계의 완벽성이 곧 자동성(Automatism)과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에도 의문을 던진다. 닫힌 체계, 즉 수동적 자동화만으로 이뤄진 기계는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반응하기 어렵다. 반면, 진정으로 뛰어난 기술적 대상은 외부의 미세한 신호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예측할 수 없는 변동성—바로 ‘불확정성의 여백(Margin of indetermination)’—을 가진 ‘열린 기계(Open machine)’다.20 

이런 점에서 레이븐포지가 전통적인 '패시브 근본주의'의 제한을 넘어서 하이엔드 액티브 프리앰프를 구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액티브 이퀄라이저의 방식은 흔히 ‘착색’을 유발한다고 여기지만, 하이 임피던스에서 연주자에게 현장 어쿠스틱 피드백을 섬세하게 반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며, 주파수 조정 역시 소리의 손실을 줄이면서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3

이러한 기술의 진화 과정은 원초적이고 추상적인 부품들이 점진적으로 내적 일관성(Internal coherence)을 획득하고, 결국 인과관계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고리를 이루며 자연적 존재와 비슷해지는, 이른바 '구체화(Concretization)'의 길과 맞닿아 있다. 시몽동의 비유를 빌리면, 연주자는 무생물 기계를 지시하는 감독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호흡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템포를 이끄는 '영구적인 조직자이자 지휘자(Conductor)'로서 기술적 앙상블(Technical ensemble)을 전체의 조화를 이끈다고 할 수 있다.20

4.2. 공간의 시학(The Poetics of Space)과 조개껍데기의 상상력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에서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넘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거주된 공간(Inhabited space)’이 어떻게 우리의 심리와 상상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바슐라르에게 집이나 쉼터란 단순한 기하학적 구조물이 아니라, 몽상과 내면을 지켜주는 ‘둥지’이자 인간성의 은유와도 같다. 우리는 상상하기 위해, 그리고 삶의 거센 폭풍 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기 위해 늘 피난처를 찾는다.21

특히 바슐라르는 조개껍데기나 서랍, 상자처럼 미니어처(Miniature)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지닌 보호의 힘에 주목했다. 조개껍데기 속으로 스스로를 숨기는 행위는 고독과 마주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이며, 이 작은 공간에 응축됨으로써 오히려 내면의 무한히 깊은 차원과 마주하게 된다(Intimate immensity). 즉, '안과 밖의 변증법(Dialectics of outside and inside)'을 통해 내적 세계의 경계가 새롭게 열린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오두막의 따뜻한 피난처가 더욱 소중해지듯, 일상 속에서 연주자는 온갖 외부의 소음과 압박에서 벗어나 악기의 공명 체임버(Chamber)라는 조용한 조개껍데기 안에서 비로소 존재의 본질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21

나아가 바슐라르는 집의 문고리나 계단의 위치를 손끝으로 기억해내는 신체의 능력을 '손끝의 기억(Fingertip memory)'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연주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주자는 시각보다 손끝의 근육 감각을 통해 지판의 곡률이나 현의 장력을 공간적으로 체득한다. 이처럼 악기는 연주자의 신체적 한계를 넓혀 주는 동시에, 개인의 심리적 거처로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토포애널리시스(Topoanalysis)’의 도구가 된다.21

4.3. 사물(The Thing)과 4중주(The Fourfold)의 모임(Gathering)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후기 철학에서 ‘사물(The Thing)’은 단순히 대상화된 객체(Object)가 아닌, 세계를 열어주고 의미를 모으는 존재론적 중심이다. 그는 「건조, 거주, 사유(Building Dwelling Thinking)」에서 ‘다리(The Bridge)’의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한다.22

다리는 결코 단순히 물리적으로 양쪽 강둑을 연결하는 구조물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가 강 위에 놓이는 순간, 각 땅은 단순한 ‘지면’을 넘어 ‘강둑’이라는 새로운 장소성을 얻게 된다. 여기서 다리는 땅(Earth), 하늘(Sky),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간(Mortals), 그리고 신성한 자들(Divinities)이라는 ‘4중주’의 본질을 한데 모으는 사물이다.22

레이븐포지의 일렉트릭 베이스 역시 하이데거가 말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란다. 무대 위에 악기가 놓이면, 톤우드가 간직한 대지의 기억, 퍼져나가는 주파수가 이루는 하늘의 울림, 유한성을 껴안고 연주하는 연주자, 그리고 창의적 영감과 환희가 그 순간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된다. 연주는 단순히 악기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술의 도구로 소비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이 본질을 드러낼 수 있도록 ‘내버려 둠(Letting-be)’의 시적 태도로 임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연주는 악기의 소리에 자신을 맡기며 그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거주(Poetic dwelling)’라 할 수 있다.26

5. ASKR 모델: 딩월(Dingwall) 하드웨어의 생태계적 진화와 극한의 이성적 뼈대

북유럽 신화에서는 오딘과 그의 형제들이 단단한 물푸레나무(Ash)에 영혼과 이성적 통찰을 불어넣어, 최초의 남성 아스크르(Askr)를 창조했다고 한다.1 레이븐포지의 ASKR 라인업 역시, 이 신화처럼 강인한 골격과 투명한 명료함을 목표로 설계된 전투적인 기체다. 이 모델은 캐나다의 루시어 쉘든 딩월이 주창한 하드웨어의 혁신적인 진화를 계승해보고자 하는 결과물이다.3

5.1. 듀얼 덴시티(Dual-Density) 바디와 '머드 캐논(Mud Cannon)' 현상의 타파

최근 현대 대중음악, 특히 모던 메탈과 젠트 장르가 부상하면서, 베이스 기타에는 극한의 저음역 확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밴드의 거대한 앙상블 속에서, 베이스의 저음역 주파수가 뭉개져 마치 진흙덩어리처럼 둔탁하게 변질되는 ‘머드 캐논’ 현상이 빈번히 나타난다는 점이 딩월의 출발점이었다. (2026-03-29 발행글 참조)

이러한 음향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ASKR는 딩월이 생산 라인에 도입한 듀얼 덴시티(Dual-Density) 바디 구조의 핵심 지향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저음현(B, E현)이 지나가는 바디 상단에는, 치밀하고 육중한 스왐프 애쉬나 북미산 하드 애쉬를 사용하여, 저주파의 단단한 뼈대와 풍부한 공명이 형성된다. 반면, 고음현(D, G현)이 자리 잡는 하단 부분에는, 가볍고 반응이 뛰어난 앨더 등 연질 목재를 결합해, 고역대의 배음이 재빠르고 유려하게 퍼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렇듯 한 악기 안에 이종 목재를 물리적으로 통합한 생태계적 설계는, 레비-스트로스가 언급했던 저음의 밀도와 고음의 유연성이라는 대립 구조를 신화적으로 매개한 사례라 할 만하다.6

5.2. 파동 방정식과 37인치 멀티스케일(Fanned-Fret) 생태계

과거 34인치 표준 스케일에서 B현을 사용할 경우, 현의 길이가 짧아 장력이 무너지고 피치가 흔들리는, 일명 ‘스파게티 스트링’ 증후군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딩월은 노박스(Novax)의 라이선스에서 발전한 37인치 멀티스케일(팬드 프렛)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하프의 현 배열 방식에 착안해, 저음현 쪽으로 갈수록 스케일을 최대 37인치까지 늘린 결과, 극단적인 장력 제어와 함께, 마치 피아노 최저음 건반을 두드릴 때처럼 이례적으로 명확한 저음을 만들어 냈다.여기에 각 현을 위한 독립 새들이 장착된 브릿지 시스템과, F1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에서 차용한 도구 없이 교체 가능한 스트링 락 시스템이 더해져, 기계적 신뢰성 또한 극한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ASKR 모델은 하드웨어의 구조적 진화뿐만 아니라, 음향적 모순을 돌파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과감한 기술적 시도가 집약된 쉘든 딩월의 유산을 잇고자 한다.3

5.3. 서사 형태론과 에너지 피드백 루프(Energy Feedback Loop)

블라디미르 프롭(Vladimir Propp)의 『민담 형태론(Morphology of the Folktale)』에 따르면, 영웅의 서사는 '결핍(Lack)'의 발생(Function 1/VIII), 조력자(Donor)로부터의 '마법의 도구(Magical agent)' 획득(Function 12-14), 그리고 최종적인 위기 극복 및 새로운 균형(결혼/왕위 계승, Function 31)이라는 구문론적(Syntagmatic) 흐름을 따른다.35

라이브 무대에서 연주자는 디스토션과 드럼 소음에 파묻혀 소리가 단절되는 결핍의 위기(Villain/Lack)에 직면한다. 이때 ASKR는 쉘든 딩월이 추구한 Darkglass Tone Capsule을 채용하거나 혹은 스튜어트 스펙터(Stewart Spector)가 추구한 HAZ Preamp를 복각하는 등 다대역 액티브 프리앰프는 결정적인 '마법의 도구(Magical agent)'로 개입하고자 한다.3 쓸모없는 하이-트레블 대역을 과감히 제거하고 70Hz, 500Hz, 2.8kHz 등등의 핵심 미드레인지를 증폭시켜, 모던 메탈의 장벽을 뚫고 나오는 압도적인 어택감을 제공한다.3

이렇게 또렷하게 발사된 소스의 에너지가 객석을 강타하면,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묘사한 것처럼 무대와 객석을 가로지르는 ‘생명의 흐름(Flow of life)'이 동역학적 에너지(Dynamic energy)의 형태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는 다시 무대 위 연주자에게 피드백되어, 그를 일종의 카타르시스(Katharsis)적 몰입의 경지로 이끈다. 쉘든 딩월이 명명한 이 ‘에너지 피드백 루프’는 ASKR라는 악기를 매개 삼아 연주자와 청중이 양자적으로 얽히는 극적인 의식이 완성됨을 보여줄 것이다.36

6. EMBLA 모델: 말로우(Marleaux)와 KD의 융합, 대지의 유기적 공명과 아방가르드

ASKR가 한계를 뛰어넘으며 남성적 창조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면, EMBLA는 그와 정반대로, 최초의 여성인 엠블라의 기원을 담은 느릅나무(Elm)에서 영감을 얻은 유기적이면서도 아방가르드한 악기다.3 과거 선박이나 활 제작에도 쓰였을 정도로 탁월한 수분 저항성과 질긴 생명력을 지녔던 느릅나무의 특징을 고스란히 닮아 있다.  EMBLA는 독일의 마이스터 제랄드 말로우(Gerald Marleaux)와 불가리아의 장인 코스타딘 디미트로프(KD Guitars)의 제작 철학을 융합하여 어쿠스틱 콘트라베이스의 온기와 레인지를 솔리드 바디에서 재현해 낸다.3

6.1. 레지오 톤 우드(Regio Tone Wood, RTW) 철학과 지속가능성

말로우는 30년 넘게 '완벽한 밸런스'와 '유기적 공명(Organic Resonance)'을 탐구해 왔다.3 그의 역작인 디바(Diva) 모델처럼 인체공학적 곡선미를 지닌 EMBLA는 연주자의 신체에 밀착할 때 발생하는 물리적 저항감을 제로(0)에 가깝게 상쇄한다.3 음향적으로는 느릅나무 특유의 교차 나뭇결(Interlocking grain)이 현의 에너지를 기공 내부로 흡수하여 날카로운 파찰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풍부한 중저음역대의 우디(Woody)한 잔향을 생성한다.3

가장 주목할 점은, EMBLA가 자연을 소모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말로우의 레지오 톤 우드(RTW) 철학을 실천한다는 사실이다.3 희귀 열대우림 수종을 수입하는 대신, 니더작센(Lower Saxony)의 지역 산림이나 발칸 산맥의 청정 지대에서 13년에서 25년 이상 자연 건조(Air-dried)된 불가리아 느릅나무(Bulgarian Elm)와 발칸 메이플(Balkan Maple)을 사용을 추구한다.37 이런 기후 중립적이고 물류상의 탄소 발자국까지 절감하는 접근은, 제인 베넷이 강조한 ‘물질에 대한 존중’이자 정치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성을 구현한 실천이기도 하다.7

6.2. 콘삿(Consat), 콘트라(Contra)의 유산과 기하학적 인체공학

어쿠스틱한 공명과 강성(Stiffness)이라는 상충하는 두 목표를 매개하기 위해, EMBLA는 말로우의 시그니처이자 독일 악기 제작의 정수를 보여주는 두 모델, 콘삿(Consat)과 콘트라(Contra) 모델의 유산을 전면적으로 계승한다. 말로우의 콘삿(Consat) 베이스는 독일 연방 경제기술부가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독일 악기상(Deutscher Musikinstrumentenpreis)'을 수상하였고, 콘트라(Contra) 베이스는 2016년 NAMM쇼에서 ‘베스트 오브 쇼 상(Best of Show prize)’ 전 세계적으로 그 완벽한 인체공학적 설계와 음향학적 우수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콘삿의 성공을 이끈 정교한 목재 챔버링(Chambering) 기술과 유려한 바디 컨투어링(Contouring)은 EMBLA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연주자의 신체에 완벽히 밀착되는 이 곡선미는 물리적 저항감을 상쇄하여 연주자가 온전히 물질과의 '내부작용(Intra-action)'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극단적인 경량화를 실현함과 동시에 목재의 어쿠스틱한 숨결을 가두지 않으면서도 외부 변형에 견디는 압도적인 텐션을 선사하는 것은 말로우가 30년 넘게 탐구해 온 완벽한 밸런스 철학의 산물이다. 콘트라는 더 나아가  고급 바이올린과 더블베이스, 비올라 등 동일한 소재로 제작하여 역동적이고 반응이 빠르며 풍부한 화음을 자랑하는 악기를 구형하였다 패시브 모드에서는 나무의 온기가 느껴지는 아코스티크 사운드를 자아내고, 특유의 마이킹 시스템과 블렌드되는 액티브 모드에서는 이러한 본연의 음색이 한층 더 강화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다.

6.3. KD Guitars의 콘 코어(Cone Core) 다중 접합 넥 구조

악기의 중추 신경인 넥(Neck)은 KD Guitars의 전매특허인 콘 코어(Cone Core) 넥 구조 철학을 도입하여 극한의 안정성을 꾀한다.3 수십 년간 건조된 불가리아 발칸 플레임 메이플(Balkan flamed Maple)에 매우 단단한 퍼플하트(Purple Heart)나 마호가니 보강재를 3피스 이상으로 다중 접합하고, 수축 팽창을 90% 이상 억제한 수지 안정화 목재(Stabilized Wood) 지판과 인도산 물소 뿔(Indian Water Bull horn) 너트를 장착한다.37

또한 EMBLA는 32인치 미디엄 스케일과 36인치 서브콘트라 스케일을 동시에 오가며, 최대 28프렛과 제로 프렛(Zero-fret)을 탑재하여, 콘트라베이스를 방불케 하는 광활한 멜로디의 캔버스를 제공한다.3 일렉트로닉스 역시 푸시-풀(Push/Pull) 방식을 통한 패시브 전환 기능과 목재 하우징으로 마감된 커스텀 험버커(Haeussel 또는 Delano 기반)를 통해, 인공적 채색을 걷어내고 목재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그대로 앰프에 밀어낸다.3

레이븐포지 모델 비교 및 오르가놀로지적 분석

ASKR (아스크르)

EMBLA (엠블라)

신화적 기표 / 질료

물푸레나무(Ash). 이성, 통제, 전투적 뼈대. 1

느릅나무(Elm). 대지의 수용성, 유기적 공명, 생명력. 1

바디 및 톤우드 공학

듀얼 덴시티(Dual-Density) 융합 (스왐프/하드 애쉬 + 알더). 3

체임버 설계 및 RTW 25년 자연 건조 발칸 지역 목재. 3

하드웨어 및 바디/넥 설계

딩월(Dingwall) 시스템: 37"-34" 멀티스케일, 스트링 락 시스템, 멀티스케일 브릿지. 3

말로우/KD 시스템: 콘삿(Consat) 모델의 인체공학적 유산, 콘 코어(Cone Core) 넥 다중 접합. 3

음향학적 / 철학적 지향점

극강의 해상도, 펀치감. 머드 캐논 극복 및 '에너지 피드백 루프'. 3

풍부한 배음, 어쿠스틱 질감. 32" 미디엄 스케일 28프렛 '내밀한 공명'. 3

전자계 (Electronics)

Darkglass Tone Capsule 등 극단적 미드 부스트 액티브 프리앰프. 3

Marleaux/Noll 3밴드 EQ, 액티브/패시브 전환, 목재 픽업 커버. 3

7.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과 브랜드 정체성의 신화적 구축

레이븐포지는 단순히 하드웨어의 스펙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글라스 홀트(Douglas B. Holt)가 『문화적 브랜딩(Cultural Branding)』에서 제시한 원칙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거대한 ‘정체성 신화(Identity Myth)’로 승화시키는 데 집중한다. 홀트에 따르면, 소비자는 브랜드를 단순한 기능적 효용의 대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급변하는 시대에 느끼는 집단적 불안 속에서, 자신만의 사회적이고 예술적인 정체성을 강화해줄 상징적 은유로서 브랜드를 받아들인다. 특히 현대 대중음악의 소음 속에서 베이시스트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톤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같은 ‘집단적 불안’을, 레이븐포지는 북유럽의 창조 신화라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빌려 해소한다.53

이러한 브랜드 구축 과정은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제안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개념을 통해 극대화된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에서는 단일한 중심 텍스트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레이븐포지 모델을 손에 쥔 연주자는 ASKR의 듀얼 덴시티 구조에 담긴 파동의 원리를 파헤치고, EMBLA의 RTW 목재에 깃든 생태적 실천 사례를 웹사이트, 매뉴얼, 그리고 온라인 포럼 등에서 마치 사냥꾼이자 수집가처럼 직접 찾아 모으게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54

이렇게 흩어진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은 닐 영(Neil Young)이 이야기한 ‘부가적 이해(Additive comprehension)’를 생성한다. 과거에는 각각 따로 존재하던 딩월, 말로우, KD Guitars의 철학 역시 피에르 레비(Pierre Levy)가 말한 것처럼, 연주자들 사이의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통해 하나의 통합된 거대 세계관(World-building)으로 재구성된다.54 결국 레이븐포지의 베이스가 지향하는 바는 연주자에게 흔하게 제공되는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는 물론, 무대 위에서는 고대의 영웅처럼 스스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게 하는 강력한 롤플레잉 매개체가 되고자 한다. 그 안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완성하며, 브랜드와 한층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54

8. 결론: 인간, 질료, 기술의 궁극적 얽힘과 공진화(Co-evolution)

레이븐포지의 ASKR와 EMBLA 라인업은 단순히 시장의 수요에 맞춰 만들어진 소비재로 그치지 않는다. 이 두 모델에서 우리는, 먼 옛날 신의 숨결을 기다리며 해변에 흩어져 있던 침묵의 유목 파편들이 현대의 악기 제작 기술과 깊은 철학적 통찰을 입어, 마침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거듭나는 오르가놀로지적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1

야신스키가 실증적으로 증명한 음향 연구를 살펴보면, 나무는 결코 수동적으로 현의 진동만을 담아내는 껍데기가 아니다.14, 제인 베넷의 통찰처럼, 나무 역시 진동하며 살아 숨 쉬는, 전자기장과 얽혀 사건을 일으키는 능동적인 행위자(Vibrant Matter)다.7  ASKR 모델은 37인치에 이르는 단단한 스케일과, 듀얼 덴시티 목재 융합이 어우러져 이성적인 뼈대를 이루고32, EMBLA 모델은 발칸산 느릅나무와 콘삿 모델에서 입증된 인체공학적 균형, 그리고 콘 코어 넥을 통해 연주자의 상상력을 품어내는 궁극의 조개껍데기이자, 대지의 공명이 살아 숨 쉬는 유기적 안식처가 된다.37

연주자가 이 악기의 넥을 쥐고 현을 치는 매 순간, 캐런 바라드가 주목한 '내부작용'과 '행위적 절단'이 거대한 물리적, 양자적 얽힘으로 폭발한다.15 연주자의 의도, 목재가 간직한 기후의 기억, 마그네틱 자장 속의 진동, 그리고 앰프의 증폭이 서로의 경계를 잃고 한데 어우러져 오롯한 음악적 현실로 구체화된다.20 이것은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술만능주의적 파국이 아니라, 시몽동의 예언대로 인간이 다시금 앙상블의 지휘자로 되돌아오고, 하이데거가 말한 네 가지의 본질이 악기라는 다리 위에 모여드는 시적 거주의 한 장면이다.22

결국 레이븐포지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수동적이고 탈정치화된 공산품 신화를 깨부수었고, 악기는 생산자의 언어이자 연주자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는 동반자라는 새로운 의미로 격상되었다. 이제 침묵하던 목재는 레이븐포지라는 심오한 세계관의 제단 위에서, 가장 섬세한 해상도와 따뜻한 생명력을 동시에 품은 채, 인간의 서사를 대변하는 영원한 발화자로 남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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